임오군란, 그날 조선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가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특히 1882년은 조선에게 정말 격동의 한 해였는데요. 우리가 보통 ‘임오군란‘이라고 부르는 큰 사건이 터졌던 해거든요. 군인들의 사소한 불만에서 시작된 이 사건이 어떻게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결국 다른 나라 군대까지 들어오게 만들었는지, 마치 폭풍처럼 몰아쳤던 그때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겠어요?
군인들의 분노, 왜 폭발했을까요?
임오군란의 시작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은 무려 13개월치 월급이 밀려 있었어요. 어렵게 받은 월급마저도 쌀이 아닌 모래나 겨가 섞인 불량품이었다니, 그 분노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시죠?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어요. 이 군인들은 새로운 별기군에게 밀려 차별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이런 군대 내부의 불만이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민씨 척족 정권에 대한 백성들의 전반적인 불만, 그리고 무리하게 추진되던 개화 정책에 대한 반감과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흥선대원군, 다시 권력을 잡으려 했을까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식 군인들은 들고일어났습니다. 왕궁으로 쳐들어가고 관료들을 공격했죠. 그러자 한동안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상황을 수습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정권을 잡으려 했습니다. 백성들과 구식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이 혼란을 잠재워 줄 거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복귀 시도는 결국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개입, 왜 시작되었을까요?
임오군란으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민씨 세력이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간청했고, 청나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규모 병력을 조선에 보냈습니다. 약 3천에서 6천 명에 이르는 청군이 서울에 진주했죠. 청나라 개입은 단순히 군란을 진압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이번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강화하고,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 간 것은 조선 왕실과 조정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관은 어떤 피해를 입었나요?
군인들과 군중의 공격으로 불타고 일본인 다수가 피살되거나 부상당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군제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구식 군대가 재편되었고, 청나라의 영향 아래 신식 군대 중심으로 개편이 추진되었다.
임오군란은 이후 개화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보수 세력의 반발로 일시적으로 후퇴했지만, 이후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점차 외세 중심의 개화가 가속화되었다.